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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한 지 5주년이 되던 1990년 1월 23일에 법인 설립 인가를 받은 주식회사 안그라픽스의 상호이다. 주식회사 설립 당시 발기인은 안상수, 김옥철, 최승현, 금누리, 홍성택, 박영미, 박정수 총 7인이며 주주는 여기에 고영희 1인을 더해 총 8인이다. 창립 당시 납입자본금은 5천만 원이었으며, 주식은 1만 주를 발행했다.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때까지 회사에 기여도가 높은 이들에게 일종의 우리사주처럼 회사의 일부 주식을 나누어 주었고, 직원 중에서 디자이너 홍성택과 박영미가 포함되었다. 홍성택과 박영미는 1985년 10월에 입사하여 1987년부터 팀장으로서 각기 자신의 팀을 이끌었다. 첫해에 발행한 주식은 총 5만 주로 창립 주주 외에 계몽사 부회장이었던 김춘식이 1기 주주로 참여하였다. 2000, 2001, 2010년 세 번에 걸쳐 주주 변동이 있었으며 현재까지 발행한 주식 수는 총 13만8천1백 주이다. 납입자본금은 현재 6억9천5십만 원으로 증가했다.

초기에 등기한 사업 목적은 도서출판 및 판매업, 편집도안 및 제작용역업, 서적 및 포스터 무역업, 컴퓨터소프트웨어 및 비디오 제작업, 저작권 중개업 등 총 다섯 가지였다. 1997년 산업디자인을 추가하고 편집도안 및 제작용역업을 삭제하였으며, 2009년 매체 및 광고대행업 외 금속구조물, 창호공사업, 옥외광고업을 추가하였다. 2014년 정기간행물 발행업을 추가하였다.

안그라픽스가 마침내 주식회사로 새로운 모습을 바꾸었다. 1990년 1월 21일부로 법인 설립 인가를 받아 (주)안그라픽스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 안그라픽스는 ‘사무실’에서 벗어나 ‘회사’가 된 것이며 따라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어느 정도 달라져야 할 때인 것이다. 물론 아직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는 없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는 법인체의 형식을 가진다는 것은 회사 경영에 있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모든것이 진행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바람직한 모습을 띨 것이라는 점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김명규, 〈에이지 뉴스〉, 199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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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라픽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사용한 사무실의 주소이다. 정확한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30-47 동영빌딩 2층’이다. 잡지 《멋》의 총 책임자였던 안상수는 발행사인 월간 마당이 부도난 뒤 동아일보에 《멋》과 직원들을 인수하고 성북동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그러나 회사에 부도난 상황을 정리할 책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채권단의 요구로 6개월 만에 성북동을 나와서 사장 대행을 맡았다. 1984년 겨울, 계몽사가 마당을 인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안상수는 관련 일을 모두 정리하고 곁에 남은 직원 5명과 마로니에 소극장이 있는 동영빌딩에 사무실을 얻었다. 그곳은 원래 (주)토탈디자인 회장인 문신규가 쓰려고 계약했던 공간이다. 그러나 동숭동 근처로 사무실을 찾는 안상수의 사정을 듣고 선뜻 양보해 주었다. 12월 20일경이다. 당시 함께한 직원은 디자이너 강석호, 박순복, 신현순, 이기정, 안경숙이다.

들머리의 ‘불행한 가로수’ 얘기에서도 잠깐 비쳤던 동숭동 일대는 1975년 전에 서울 대학교를 나온 이에게는 마로니에와 더불어 학창 시절의 추억이 밴 땅이다. 그들은 그때에 드나들던 학림 다방, 대학 다방, 쌍과부집 같은 곳의 얘기만 들어도 그 시절의 ‘빛나던’ 대학 생활을 환히 되살려낸다. 이곳은 동쪽의 낙산 기슭에 아파트와 연립 주택들이 아무렇게나 들어차 주위 경관이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서울대학교가 떠난 대신에 여러 문화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 보기로는 우선 옛 서울 대학교 본부 건물을 손질하여 쓰고 있는 한국 문화 예술 진흥원과 그에 딸린, 김 수근 씨의 설계로 붉은 벽돌로 지은 미술 회관과 문예 회관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홍사단 아카데미 사무실을 비롯하여 「샘터」라는 월간 잡지를 펴내는 샘터사, 디자인 포장 센터, 「꾸밈」이라는 생활 미술 잡지를 내는 토틀 디자인 사무실 같은 ‘준문화’시설들이 자리잡아 문화 활동을 직접으로 또는 간접으로 돕는다.

〈동숭동의 문화 거리〉, 《한국의 발견 6: 서울》(뿌리깊은나무),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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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하여 1985년 준공했으며, 안그라픽스에서 1988년 12월 20일부터 사용한 두 번째 사무실의 건물 이름이다.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34 두손빌딩 3층’이다. 당시 안그라픽스는 직원수가 20명을 넘어서면서 1-2분 거리의 동숭파출소 근처에 추가로 업무 공간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다. 두손빌딩으로 이전을 권유한 이는 김동환이다. 자신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기존 사무실을 쓸 만한 적임자로 안그라픽스를 꼽은 까닭이다. 김동환은 두손빌딩 건물주였던 김양수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두손빌딩은 복층구조로 사무공간이 충분했을 뿐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도 거의 손볼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 구름다리로 연결되는 안상수의 개인 사무실 정도를 새로 설치했다. 1994년 9월 성북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약 여섯 해를 이곳에서 지냈다. 초기 사무실과는 약 7분 거리이며 혜화역 1번 출구 앞 현 맥도날드 건물 자리에 있었다. 지금은 재건축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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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안그라픽스에서 제작 전반에 DTP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구매한 컴퓨터이다. 안그라픽스는 1988년 3월 한국전자출판연구회 창단 멤버로 참여할 만큼 초기부터 전자출판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또한 그해 7월 기준으로 이미 IBM 컴퓨터 10대, 레이저 프린터 1대를 보유할 만큼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업무 환경을 구축하고 있었다.

1989년 10월 25일, 전자출판 시스템의 핵심인 매킨토시(Macintosh SE/30)와 스캐너, 맥용 레이저 프린터를 구매하였다. 매킨토시 한 대 가격만 20,888,650원이었다. 11월부터 직원들에게 매킨토시와 쿼크익스프레스(QuarkXpress) 운용법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쿼크익스프레스는 1987년 미국 쿼크 사에서 출시한 출판 편집 프로그램으로 1988년에 (주)신명시스템즈(대표 김민수)에서 일본어 버전을 갓 한글화한 상태였다. 당시 안그라픽스 직원이었던 김강정의 소개로 김민수 대표와 연이 이어졌다.

안그라픽스는 국내 디자인회사로서는 최초로 쿼크익스프레스를 실무에 도입하였다. DTP로 처음 만든 제작물은 IBM 고객 사외보 1990년 봄여름 합본호(1990년 6월 발행)이다. 한글판이 아직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발생했으며 결과물의 판짜기 품질도 현저히 낮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호부터 일정 기간 동안 다시 사진식자로 작업하였다. 1990년 6월과 8월에 매킨토시 II 계열 한 대씩을 추가로 구매하였다. 1-2년의 테스트 기간을 거쳐 1991년 겨울호부터 본격적으로 DTP를 시작하였다. 아시아나 항공 기내지에도 1991년 12월호부터 부록에 부분적으로 DTP를 적용했으며 1992년 3월호부터는 적용 범위를 전반으로 확대하였다. 안그라픽스의 DTP 테스트 과정은 매킨토시 한글 OS와 쿼크익스프레스 한글판의 품질을 개선하는데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매킨토시 교육 또 교육

멤버를 바꿔가며 멀리 여의도까지 맥킨토시를 배우러 다닌데 이어 이번에는 맥킨토시 판매회사의 직원이 직접 내사하여 AG맨들에게 쿽의 운용방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모두 빙 둘러앉아 열심히 설명을 듣고 질문하고 직접 운용해가면서 맥킨토시를 하나하나 정복해가는 모습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탐험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어서 빨리 맥킨토시를 다먹고 계속해서 국광, 홍옥, 부사까지 모두 다 먹어버리길 기대한다.

김명규, 〈에이지 뉴스〉, 198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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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창간하여 2000년까지 발행했으며, 1988 년 4월 13일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매체국 신문과에 정식 등록한 안그라픽스의 계간 예술전문지이다. 인터뷰 중심으로 문화예술 각 분야의 전위적 인물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한다는 취지로 금누리, 안상수가 공동 기획하였다. 내용뿐 아니라 실험적인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레이아웃으로 주목 받았으며 2011년 10월에 월간 《디자인》에서 진행한 ‘전문 디자이너 135 명이 뽑은 한국의 디자인 프로젝트 50’에 포함되었다.

계간지로 기획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한 해에 네 번까지 발행된 적은 없는, 사실상 비정기 잡지이다. 1-4호는 타블로이드 판형에 중철제본으로 제작되었으나 5호부터는 잡지와 책의 혼합 형태인 무크지로 제작 되었으며 판형도 제각기 다르다. 7호(기호 언어 예술 책)와 8호(ㄱㅇ)처럼 인터뷰라는 기본 뼈대와 상관없이 전시 도록으로 제작한 경우도 있다.

1994년 9호가 발행된 뒤 2년간 휴간 상태였으며 1997년 3월 판형과 레이아웃을 새롭게 바꾼 10호 《가 가가》가 발행되었다. 이때부터 인터뷰와 편집 진행을 회사가 아닌 안상수의 개인 작업실인 날개집에서 맡았고, 1998년까지 연간 3회라는 안정된 주기로 잡지를 발행하였다. 2000년 8월에 마지막 책인 17호 《아아 아》가 발행되었으며 18호는 인터뷰까지 진행된 상태에서 내부 사정으로 제작되지 못했다

보고서\보고서 선언

새로운 표현법이 필요하다.
····· (주1)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2)
여기 새로운 표현을 하고자 한다. (주3)
그 방식을 “보고서\보고서”라는 이름의 묶음으로 택했다.
그 곳에는 무엇이든 들어가 자기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경우에 따라 백지로.
그것도 투명한 백지의 묶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기존의 -“책”의 형식에서 출발할 것이나 그 안에는 글만이 아니라
조각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시,
사진,
음·····그 소리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주4)
그것 자체가 -‘이미지’가 될 것이다.
이미지의 창출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새로운 표현 욕구를 지닌 모든 이의 것이다.”

198806
창간 동인
안상수, 금누리

《보고서/보고서》 1호, 19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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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수행하는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디자인, 디지털, 미디어, 출판으로 구분되는 안그라픽스의 조직 단위이다. 안그라픽스는 1987년 최승현의 제안으로 사수 형태의 팀장제를 처음 도입하였다. 실력이 높은 사람이 팀장이 되어 상대적으로 경험치가 낮은 이의 역량을 길러 주는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사원 대부분이 디자이너였기에 이 방식이 유효했다. 이듬해부터는 디자인, 편집, 기획, 회계, 영업 등 담당 업무에 따른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8년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지를 수주하면서 1989년부터 《아시아나》 제작에 참여하는 이들을 업무와 상관없이 아시아나 팀으로 구분했다. 1991년에는 기내지 광고 영업을 위한 광고 팀과 자체 출판물의 유통을 담당하는 출판 팀이 새로 조성되었다. 디자인 팀은 그 즈음부터 한동안 제작팀으로 불렸다. 1995년 와우북 시리즈 출간을 계기로 출판 팀은 기획, 편집, 회계, 영업 부분을 갖춘 독립 부서로 성장했다. 1997년 7월 야후코리아의 협력사로서 디지털 팀을 신설하였다. 그 해 안그라픽스 조직 체계는 기획팀, 광고팀, 아시아나 팀, 제작팀, 출판팀, 디지털팀, 관리팀 등 7개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1998년부터 업무의 성격이 아닌 매체의 성격에 따른 사업부제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2년 여 유예 기간을 거쳐 2000년 사업부제가 시행되었고, 2001년부터 사업부별 자금수지 분리가 이루어졌다. 기획 팀과 제작 팀과 아시아나 팀은 디자인사업부로, 디지털 팀은 디지털사업부로, 광고 팀은 미디어사업부로, 출판 팀은 지식정보사업부로 정비되었다. 사업부제 시행 이전에는 회사의 모든 디자인 작업을 제작 팀에서 진행하였으나 이후에는 각 사업부별로 디자인 업무를 소화했다. 이를 위해 제작팀의 기존 디자이너 중 일부가 디자인사업부가 아닌 다른 사업부로 소속을 옮기기도 했다. 미디어사업부만은 디자인사업부 내에 제작 팀을 두고 광고 팀만으로 운영되었다. 디지털 팀은 신설 이듬해인 1998년부터 디자이너를, 2000년부터 개발자를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출판 팀은 2000년부터 전담 디자이너를 채용하였다. 관리 팀은 네 개 사업부의 업무를 지원하고 경영 전반을 관리하는 중립적인 부서로 남았다.

2003년, 업무 효율을 위해 디자인사업부에 소속 되었던 《아시아나》 제작 팀이 미디어사업부로 통합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미디어사업부는 광고와 편집디자인 대행을 겸하는 정기간행물 부문과 편집디자인 전반 영역으로 사업 범위를 확장하였다. 창립 20주년을 맞아 2004-2008년에는 현재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비전을 준비하기 위한 미래사업 팀을 신설하여 운영하였다. 2009년부터는 지식정보사업부를 팀 체제로 변경하여 출판 1, 2, 출판영업 팀으로 분리 운영하고 있다. 2011년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제작을 전담하는 출판 3팀을 신설하였고 2014년 《론리플래닛 매거진》 제작 팀이 속한 미디어사업부로 이를 통합하였다. 현재 안그라픽스의 조직 체계는 디자인・디지털・미디어 세 개 사업부와 출판 1팀, 2팀, 출판영업팀, 경영지원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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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9월 넷째 주부터 20여 년간 사용한 안그라픽스의 세 번째 사무실 주소이다. 1994년 7월 중앙일보 소유의 성북동 사무실을 정식 계약하였다. 대중교통이 편리하고 문화 시설과 음식점이 즐비한 동숭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하여 교통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사전 대책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새 사무실의 인테리어는 현대미술 작가인 최정화가 맡았다.

안그라픽스는 1991년 무렵 네덜란드 페어케르케사와 제휴하여 아트 포스터를 생산, 판매하면서 혜화동 부원빌딩에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던 광고 팀과 출판 팀이 9월 4일 성북동 사무실에 먼저 입주했다. 동숭동 본사 사람들은 그 달 마지막 주에 이전했다. 처음에는 1층과 2층만 사용했으나 1996년 3층을 추가로 임대하여 이후 건물 전체를 사용하였다.

1999년 12월 20일, 직원 수가 늘어나면서 약 2분 거리에 있는 단독 주택을 추가로 임대하였다. 회계 팀, 광고 팀, 출판 팀이 입주했다. 대문이 빨간색이어서 직원들 사이에서는 ‘빨간 대문 집’으로 불렸다. 입주 직후인 2000년 1월에 큰 화재가 났다. 2001년 7월 출판팀이 사간동 북수빌딩으로 자리를 옮긴 뒤 본관에 있던 아시아나 팀이 입주했다. 이후 계약이 종료되는 2011년 5월까지 미디어사업부와 대표이사가 별관을 사용하였다. 이곳 앞마당에는 안그라픽스 애완견인 우태우베가 살았다.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성북동 사무실은 구도심인 성북동 특유의 고즈넉하고 호젓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오랜 세월 안그라픽스의 인상을 대표했다. 안그라픽스 본사는 2013년 12월에 상암동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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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인 1989년 1월호부터 현재까지 안그라픽스에서 제작을 전담하고 있는 아시아나항공의 월간 기내지 이름이다. 경쟁 프레젠테이션 없이 고객사에서 안그라픽스에 공식 의뢰함으로써 일이 성사되었다. 당시에는 기내지와 같은 매체를 제작할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았다. 1988년 10월부터 실질적인 팀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안상수가 아트디렉터, 김옥철이 AE로서 프로젝트 진행을 맡았다. 잡지 《멋》의 기자 출신인 김영주가 편집장으로 새로 합류하였고 홍성택이 선임 디자이너로서 제작을 맡았다. 안그라픽스 최초의 사진 스태프인 최온성도 그해 12월에 입사하였다.

1989년 9월에는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취항을 앞두고 국제선용 《아시아나》가 기획되었다. 국내선만 운항하던 첫해에는 한글 로고를 사용하였으나 이 또한 영문 로고로 바꾸었다. 첫 영문 로고는 미국의 기업 아이덴티티 전문 회사인 랜더 어소시에이츠(Landor Associates)에서 제작하였다. 1990년 1월부터 일문판과 영문판을 함께 수록한 새로운 포맷의 책자를 발행하였다. 1대 일문판 편집장은 토다 이쿠코, 영문판 편집장은 게리 렉터(유게리)이다. 초기에는 이수해외광고와 K.T.N광고대행사를 통해 광고 영업을 하였으나 1991년부터는 이용승을 중심으로 자체 광고 팀을 운영하였다.

홍성택을 비롯하여 김두섭, 이세영, 민병걸, 최준석, 천상현, 김상도, 안병학, 심완섭, 정영웅, 안삼열 등 현재 디자인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많은 디자이너가 이 매체를 거쳐 갔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는 고() 아키히코 다니무라가 일문판 아트디렉터로 참여했으며, 2003년부터 2009년 4월까지는 스기우라 고헤이 사무실인 Sugiura Kohei Plus Eyes Inc.에서 일문판을 디자인하였다. 《아시아나》는 1990년 국제선 용으로 변모한 이후 1995, 1998, 2003, 2007, 2010, 2014년 총 6회 리뉴얼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새로운 기내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기획회의를 하는 모습에서 누가 팀장이고 기자이고 디자이너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최고의 내용과 최상의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기내지를 만들며 중요한 것은 그 하나이기 때문이다. 안그라픽스에서 아시아나 항공의 기내지를 만들기 시작한 지는 벌써 9년, 아시아나 항공에 소속되어 있는 편집팀이 아닌 외부 편집 대행사지만 아시아나 항공과 기내지에 대한 열정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크다고 자부한다. “문화를 실어 나르는 존재.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문화를 교류시키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항공기라고 생각합니다. 기내지에도 역시 그런 것들을 담아야 하구요.” ...... 일을 하면서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항공사의 얼굴이라는 점이다. 보기에 좋은 문화가 아닌 살아 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를 담아 보려고 준비중이다. 그 계획이 실제로 옮겨질 때는 1998년. 새로운 모습으로의 정비 계획을 이미 잡아 놓은 상태다. 새로운 아시아나 기내지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모든 승객들에게는 아직 비밀인 셈. 전 세계 항공사들의 수만큼이나 기내지의 숫자도 많다. 그 중 최고의 기내지. 궁극적인 기내지인 ‘유토매거진’이 아시아나 기내지 제작팀의 목표다.

〈유토매거진을 꿈꾸는 사람들〉, 《워킹우먼》, 19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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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안그라픽스 창립과 함께 시작한 출판 브랜드이다. 안그라픽스는 출판으로 시작한 디자인 회사로 처음 이름은 ‘AHN GRAPHICS & BOOK PUBLISHERS’이다. 신고만으로 승인되는 영업감찰(현 사업자등록)과 달리 1980년대에 출판업은 허가제였고 시대적인 정황상 신규로 허가를 받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출판을 하기 위해서는 출판사 등록 허가증을 보유한 업체에 돈을 주고 증서를 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웃돈이 오고가는 일도 흔했다. 안상수는 당시 거래처인 고려문예사 대표의 선의로 그 회사에서 보유한 허가증을 적정한 금액에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증서를 받아 명의 이전한 날을 회사의 시작, 곧 창립일로 삼았다. 이후 안그라픽스는 한국전통문양집(1986-1996), 《보고서/보고서》(1988-2000), 《타이포그라픽 디자인》(1991), 《디자인사전》(1994), 《디자인 문화비평》(1999-2002), 《나나프로젝트》(2004-2012) 등 한국 디자인 역사에 기록될 만한 서적을 꾸준히 출간해 왔다.

1995년 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 매뉴얼인 와우북 시리즈의 출간과 2003년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리플래닛의 한국어판 독점 출판은 안그라픽스 출판 브랜드의 양적 성장과 대중화에 일조하였다. 와우북 시리즈를 처음 출간한 해에 출판만으로 월 매출 5천만원을 달성했으며 웹과 디지털로 전문 분야를 확장하면서부터는 출간 종수가 서너 배 증가하였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은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했던 안그라픽스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고 여행 전문 출판사로서의 입지를 제공했다. 디자인에서 컴퓨터와 디지털, 여행과 문화 일반으로 출판 영역을 넓히면서 곧 브랜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2008년 안그라픽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그라픽스’와 별도로 여행과 문화 일반에 특화된 출판 브랜드 ‘컬처그라퍼’를 선보였다. 디자인 전문 출판사라는 전문성을 지키면서도 교양과 문화 전반으로 출판 영역을 확장하여 종합 출판사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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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그라픽스의 설립자이며 현 기업부설연구소 소장이다. 창립 해인 1985년에 발표한 안상수체를 바탕으로 타이포그래피가 바로 선 디자인 회사, 직원과 함께 공부하고 성장하는 학교 같은 회사를 만들고자 했다. 1990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그 해 9월 대표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내이사이자 디자인 고문으로서 안그라픽스의 행보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 왔다. 날개집을 중심으로 《보고서/보고서》 《나나프로젝트》 《라라프로젝트》 《바바프로젝트》 등 여러 산학협력 프로그램을 안그라픽스와 진행하였다.

2012년 홍익대학교를 정년퇴임한 뒤에는 디자인 대안 학교인 PaTI를 설립하여 바른 디자인 교육에 힘쓰고 있다. 같은 해 한글글꼴 연구와 개발을 위해 회사 내에 타이포그라피연구소를 신설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내가 되풀이해서 얘기했던 건 “나를 닮지 말라.”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안그라픽스에 와서 영향은 받을 수 있겠지만, 안그라픽스 판박이가 되면 안 되는 거지요. 나를 참고해서 작업하더라도 거기에 자기 스타일이 나타나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떤 스타일에 대해서 싫증을 느낍니다. 만일 내가 안그라픽스 스타일이라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싫증을 느낄 때 안그라픽스도 힘을 잃게 되겠지요. 일하는 사람들이 나를 닮지 않고 스스로 스타일을 만들어 가면 안그라픽스는 늘 그 사람들에 의해 새로워질 겁니다.

안상수, 30주년 기념 인터뷰, 201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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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1일 창간하여 1998년에 폐간한 사내 소식지이다. 사무실 입구 게시판에 게시하는 낱장 단위의 출력물로 별다른 디자인 없이 글자만 타이핑한 형태이다. 공식적인 결정이나 지침의 하달보다는 그날그날 일상의 기록, 서로에 대한 관심과 격려, 더 나은 업무 환경을 만들기 위한 수평적 독려가 주된 내용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바쁜 업무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격일, 주간, 월간 등으로 발행일이 불규칙해 졌다. 그러나 대표이사의 직간접적인 개입으로 발행이 완전히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1995년에는 약 5개월간 ‘bonjour ag’와 ‘ag tidings’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소식지 작성은 기본적으로 직원 누구나 할 수 있었으나 80년대 후반에는 최승현, 정영림, 안정인, 유태종, 김명규가 주로 글을 썼고, 90년대에는 강재연, 김훈배, 이현정, 권선희, 서윤천, 신재욱, 안재경, 박승영 등이 소식지 작성을 맡았다.

— 323/mar/yjkim

2. 안그라픽스의 문화생활이 점점 메말라가는 기분이 든다. 대한민국에서 최첨단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 문화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실상 문화를 잊고 산다. 문화생활을 모르면서 문화적인 일을 해야 하는 아이로니....
우리는 과연 한 달에 영화 몇 편을 보며, 하루 중 순수한 마음으로 책 한 권을 들여다 본 적이 있으며 각종 음악회 전람회 무용제 연극 등에 한번이라도 관심을 쏟아본 적이 있으며 정말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 한 잔과 함께 그날의 조간신문을 읽어본 적이 있으며 가끔 바하나 모짤트, 또는 비틀즈의 음악에 귀 기울인 적이 있을까. 우리의 일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방편도 아니오, 하루하루 목숨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비극적인 삶도 아니다. 즐겁고 건강하게 안그라픽스의 하루를 맞자. 문화를 사랑하고 그것을 참되게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문화를 외면하고 그것을 경시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주자.
결국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오,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3. 에이지뉴스는 모든 스텝들에게 편집의 권한을 준다. 주어진 발언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바란다. 관심의 범위를 최소한 에이지뉴스의 편집자가 되었을 때만이라도 넓히도록 하자.

김영주, 〈에이지 뉴스〉, 1989.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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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라픽스에서 자체 기획하는 영리, 비영리 프로젝트와 관련 연구를 담당하는 조직이다. 연구소에 대한 처음 구상은 안그라픽스가 주식회사로 전환되기 이전인 1989년에 한국활자연구소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안그라픽스 연구소는 1991년 11월 안상수의 개인 작업실로 시작하였으며, 이곳은 안상수의 호를 따서 날개집으로 불렸다. 날개집 조교는 안상수의 교내외 작업을 지원함은 물론 안그라픽스의 비공식 연구 조직으로서 글자체 개발, 《보고서/보고서》 제작, 로고 개발 등 다양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서 두각을 드러낸 학생들이 회사에 직원으로 채용되는 일도 잦았다.

2005년 5월에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KOI- TA)에 등록한 정식 기업부설연구소 ‘디지털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디자인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디자인연구소’라는 명칭으로 등록 신청했으나 당시에는 산업디자인에 속하지 않는 분야로는 부설연구소를 설립할 수 없었기에 서류가 반려되었다. 연구소장은 안상수가 맡았다. 다만 당시 학교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디지털사업부 김종열이 직무를 대행했다. 2012년 홍익대학교를 퇴임한 뒤부터 연구소장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안그라픽스 연구소는 디지털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두 분야로 각기 팀을 꾸려 운영되고 있다.

agfuture, do, 05/20/89
안그라픽스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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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바탕 위에서 한다.
우리는 최적을 지향한다. optimum
문화를 존중한다.
우리의 표현 체계를 갖는다.
이를 위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며 분배한다.
분야:
디자인 서비스:
출판: KOREAN MOTIFS
디자인 문고
잡지: 보고서/보고서
타이포그라피(기둥)
한국활자연구소
출판 서비스
정보 서비스: 데이타베이스, 제작시스템
마케팅

안상수의 메모, 198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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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눈을 가리고 찍은 사진이자 설립자 안상수가 1988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 명칭이다. 근 10년 내에 안그라픽스에서 근무한 사람 중 원아이를 한 번도 찍지 않은 이는 드물다. 설립자가 참석하는 시무식 등의 연례행사와 세미나에서는 으레 단체 원아이를 찍으며, 자칫 안상수의 맞은편이나 옆자리에 앉으면 엄청난 수의 개인 원아이를 찍힐 수 있다. 안상수는 1988년 《보고서/보고서》 1호 표지에 사용한 자신의 한 눈 사진에 영감을 얻어 원아이를 찍기 시작했으며 2004년 즈음 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프로젝트화하여 26년간 지속해 왔다. 2013년 2월에는 디자인 대안 대학인 PaTI의 설립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간 찍은 원아이를 모아 〈원.아이.파티.파티(one.eye.PaTI.party)전〉을 열었다.

안 교수는 왜 이런 작업에 매달렸을까. 그는 “1988년 금누리 교수(국민대)와 함께 만든 잡지 ‘보고서/보고서’ 창간호 표지에 쓰기 위해 찍었던 제 사진이 출발점이 됐어요. 별 뜻 없이 재미 삼아 한 제스처였는데, 한 눈을 가려도 그 사람의 특징은 충분히 드러난다는 걸 깨닫게 됐죠”라고 했다. 이어 2004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이번 프로젝트에 속도를 가했다. ‘일기쓰기’와 같은 작업이 됐다.
“(사진 3만 장)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찍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의미’가 자라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요. 저는 사진이 시간에 의해 성숙한다는 말을 믿습니다”
사람 얼굴에 집착한 이유를 물었다. “사람이 가장 흥미롭지 않나요. 지금도 사람 만나는 일이 저를 가장 설레게 해요. 어떤 사람을 새롭게 만나는 일은 내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과 같죠.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일이니까요.”

〈“한 눈 가려달라” 했더니 ... 3만 개의 사연 쏟아졌다: 안상수 ‘원 아이’ 프로젝트〉, 〈중앙일보〉, 20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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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경 안상수와 금누리가 공동 투자하여 만든 한국 최초의 인터넷 카페로 전자카페로도 불렸다. 네트워크 통신을 이용한 예술 작업을 위해 미국 산타모니카의 두 작가와 뜻을 맞춰 LA와 서울에 각기 만들었으며 1991년 문을 닫았다. 본래 취지는 홍대 앞의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이었으나 실제 문을 연 뒤에는 전자통신동호회와 같은 컴퓨터 관련 분야의 사람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다. 염진섭(전 야후코리아 대표), 한규면, 박순백 등 전자카페를 통해 맺은 이들과의 인연은 안그라픽스가 종이 기반의 편집디자인에서 디지털로 사업 분야를 넓히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네트워크 전문가인 한규면은 사내 업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컨설팅 덕분에 안그라픽스는 이른 시기에 인트라넷을 구현하는 등 이상적인 업무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일렉트로닉 카페를 열고 2여 년이 지난 1990년 9월 17일, LA와 서울 간의 통신 미술 프로젝트가 비로소 성사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전화 라인 4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카페가 아닌 안그라픽스 두손빌딩 사무실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국내 참여 작가는 조각가 금누리・백광현・문주・이규철, 화가 고낙범・김장섭・최정화, 행위예술가 이불, 그래픽디자이너 안상수 총 9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다는 것 이외에 멋있는 뜻으로는 서로 다른 먼 곳의 작가들과 동시에 다발적인 작업을 공동으로 이룰 수 있고, 텔레비전 등 방송 매체의 일방적 화상 및 정보 전달과는 달리 서로의 조형적 표현을 주고 받을 수 있으며, 여러 지역에서 같은 시간대로 공통의 조형적 표현이 재창조 되기도 한다는 데 있다.

〈전자카페 계획〉(금누리), 《공간》, 19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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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라픽스의 경영 철학이자 사훈이다. ‘지성’은 안그라픽스를 처음 설립했을 때 글자디자이너인 고() 최정호 선생이 이런 회사가 되길 바란다며 친필로 써서 준 단어이다. 1987년 9월, 안상수는 이를 ‘안그라픽스가 좋아해야 할 말’로 삼고 이 말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에서 나왔다고 밝혔다.(〈에이지뉴스〉 1987.9.2) 창립 20주년을 맞은 2005년 안상수가 여기에 ‘창의’라는 말을 더하면서 ‘지성과 창의’라는 현재의 기업 철학이 정립되었다.

지성(至誠)...
안그라픽스.처음.사훈은.‘지성’입니다..
돌아가신.최정호.선생님이.주신.귀한.말입니다..
동숭동.시절.현관.빨간.벽에.
이.글씨.액자가.걸려.있었습니다..
이것을.잃어버렸어요.. 찾지.못해..안타깝습니다..
저는.그분에게.이.글을.받았을.때..
좀.시시하다는.생각을.했습니다..
그러나.나중에.〈중용〉을.배우면서..
이.말의.깊은.뜻을.깨달았지요..

참된.정성.그.자체는.하늘의.길이고..
진심으로.정성스럽게.하는.것은.사람의.길이다.
誠者.天地道也..誠之者.人之道也.〈중용〉

우주.역사.40억.년이.이렇게.정성스레.
우리가.사는.지구를.만들고..
지구가.밤낮.봄여름가을겨울로.정성스레.운행되듯이..
살아가면서.모든.일을.정성스럽게.하는.것이..
사람의.도리라는.말이지요..
성은 ‘늘.꼼꼼하고.. 틈이나.쉼이.없이..
오직.부족함을.두려워하는.마음’을.말합니다..

최정호.선생님이.주신.지성(至誠)은.바로..
정성을.지극히.하라..
지극히.성심껏.하라는.뜻이었습니다..
정성이.없는.곳에는.집단의.존재도.없다.
지성이란.처음이자.끝이며.바탕이자.결과이니.
정성껏.모든.일을.하라는.
AG에.대한.애정.어린.부탁이었습니다..

창의(創意)...
세계적인.창의.전문가.심리학자.칙센트미하이는
‘창의성은.한.개인의.머리에서.나오는.것이.아니라.
오랜.노력과.여러.조건이.어우러져.빚어내는.
상승작용의.결과’라.하고..
그것이.몰입에서.나온다고.했습니다..

‘몰입은.자기목적성이.충만한.사람에게서.발견되는.특징이며..
자부심과.희열.. 집중과.적극성을.이끌어.내는.동인’이라고.합니다..
몰입-창의에서.맛볼.수.있는.즐거움은.삶의.질을.높이고.삶을.풍성하게.함으로써.진정한.행복감을.느끼게.합니다.

모든.이의.삶의.목표는.
삶의.완성이라고.할.수.있는.‘행복’일.것입니다..
그.행복은.어디서.오는.것일까요?
지성과.창의의.겸비야말로.
집단에.활력을.주고..
개인의.행복을.이루는.바탕이.될.것입니다..



안상수, 수요세미나 요약, 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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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30일 토요일, 안그라픽스의 시작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알린 행사이다. 낙산 기슭에 위치한 동숭동 사무실에서 열렸으며 만신 김금화가 굿을 맡았다. 김금화는 같은 해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에 지정되었으며 그의 삶은 2014년에 〈만신〉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마당〉.시절.취재로.알게.된.만신.김금화.님..
어느.날.우연히.전화.통화를.하는데..
“개업식을. 해야.하는데.고민입니다.. 남들처럼.하고.싶지.않고”..
대뜸.그분.왈.“굿하면.되지.. 굿이란.이럴.때.하는.거야요.. 100만원만.준비해요.. 내가.하라는.대로만.하면.돼”..
한복을.맞춰.입고.정해진.날.저녁..
멀리서.꽹과리.피리.소리가.들렸다..
대학로.큰길부터.풍각을.울리며.낙산기슭으로. 굿패들이.오면서.길모퉁이마다.막걸리.동이와. 쪽박을.놓고.온다.했다.. 굿이.시작되었다..
굿이.정점에.이르자.진한.사설이.튀어나오고..막걸리로.나를.취하게.하더니.. 끝났는지.모른다..
이튿날.오후.그분께.전화가.왔다..
“괜찮아? 이제.나하고.굿하러.다녀요”..
그.후에도.몇.번.그분의.굿판에서.어울렸다.ㅎㄴㄱ.모심.



안상수, 〈안그라픽스 30년의 기억〉 페이스북 그룹, 20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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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8일로 시무식, 송년회, 종무식과 함께 안그라픽스의 4대 연례행사 중 하나이다. 설립자인 안상수의 태어난 날이며 고려문예사의 출판사 등록 허가증을 넘겨받아 명의를 이전한 날이기도 하다. 안그라픽스는 2015년으로 30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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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라픽스에서 발행한 얀 치홀트의 저서 《Typographische Gestaltung》의 한글판으로 한국 최초의 타이포그래피 관계 번역본이다. 1991년 6월 1일에 초판, 1993년 7월 15일에 개정판, 2006년 3월 22일에 재개정판, 2014년 2월 7일에 독일 원전 번역판을 출간하였다. 1991년 초판과 1993년 개정판은 동일한 표지를 사용하여 한눈에 구분이 어렵다. 개정판은 하라 히로무의 글과 얀 치홀트 연보와 작품 등 여러 부록을 수록하여 초판보다 쪽수가 한층 늘어났다.

초판과 개정판과 재개정판은 1967년 루아리 매클린이 옮긴 영어판 《Asymmetric typography》을 안상수가 한글로 옮긴 것이다. 2014년 독일 원전 번역판은 스위스 바젤디자인예술학교의 현 연구 조교인 안진수가 옮겼다. 책의 제목 또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으로 고쳤다.

1978년 봄이었던가. 대학 졸업 뒤 직장을 잡고 보니 바빠서 영 짬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만은 점심 먹고 바로 퇴근해 내 시간을 가지리라 마음먹었다. 대학 때 자주 가던 서울 광화문과 종로1가에 흩어져 있는 외서 책방들을 들렀다. ...... 그 날은 종로1가 농협 옆 외서 책방을 다섯시 넘어 마지막으로 들렀다. 책방 안에는 서점 직원 둘이 책을 정리하고 있었고, 나는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미술 서적이 꽂혀 있는 서가의 맨 아래쪽에서 얄팍한 책 한 권이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에시메트릭 타이포그래피〉라는 작은 제목을 단 책이었다. 먼지가 앉았지만 깔끔한 디자인의 겉싸개와 그 사이로 단단하게 제본된 까만 하드 커버가 야무지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 책을 정리하던 점원이 자꾸 눈치를 주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였는지 귀찮아하는 것이 역력했다. 마침내 말했다. “반값에 줄테니 가져가요.” ...... 앓느니 죽는다고, 나는 읽느니 번역하겠다고 덤벼들었다. 잡지사 친구와 만난 자리에서 얘기했더니 그는 잡지에 연재하자 했고, 마침내 〈타이포그라픽 디자인〉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책을 읽으며 번역하는 사이 나의 길에 소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삶이었다.

〈78년 봄 종로 헌책방, 운명 바꿔놓은 ‘타이포그래피’와의 조우〉(안상수), 〈한겨레신문〉, 199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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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시작한 안그라픽스의 교육 제도이다. 첫해에는 프로젝트와 출장 리뷰가 주를 이뤘으나 이듬해부터 전체구성원의 교양과 업무 역량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수요 디자인세미나를 별도로 마련하여 토요세미나와 병행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세미나 참석은 강제 사항이었고, 불참 시 월차 휴가 자격이 박탈되거나 결근으로 처리되는 등 강도 높은 불이익이 있었다.

토요세미나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디자인회사의 세미나로서 색깔을 분명히 하였다. 1992-1994년에는 해외 디자이너와 한국 전통에 대한 개별 조사 발표와 함께 디자인사와 디자인 사고에 대한 이론 강연을 진행하였다. 세미나는 전 직원 대상이었지만 발표 주체는 디자이너로 한정되었다. 격무에 시달리면서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토요세미나는 여러 번 중단될 위기를 겪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90년대 중후반에는 매해 세미나 전체를 외부 강연으로만 구성하기도 하였다.

2000년 사업부제를 시행하고 사무실이 여러 곳 으로 나뉘면서 토요세미나는 성북동의 디자인사업부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세미나 하는 날이 월요일로 바뀌었고, 90년대 초반처럼 구성원이 직접 세미나를 준비해서 발표하는 방식을 취했다. 2010년부터는 완전히 외부 강연 중심으로 계획되고 있으며 월요일에서 수요일로 요일이 또 한 번 바뀌었다.

토요세미나에 대한 대표이사 기고문

토요세미나는 안그라픽스의 직원들에 대한 교육명령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제도이며, 외적으로는 많은 외부인들에게서 극찬을 받으면서 지난 8년동안 시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매우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나태한 자세에서 출발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더이상 방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앞으로 이제 이 제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토요세미나는 안그라피스의 가장 중요한 제도 중의 하나로서, 그동안 안그라픽스를 이끌어온 정신적 지주입니다. 앞으로 모시게 될 강사분들은 더욱 엄선해서 좋은 강의가 되도록 할 것이며, 좋은 강의 내용들을 모아서 안그라픽스 홈페이지에도 동화상과 함께 소개할 생각입니다. 직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희망합니다. 토요세미나 참석은 ag인의 의무입니다.

〈에이지 뉴스〉, 199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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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문발동에 위치한 파주출판도시 사옥의 옛 주소이다. 현재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125- 15(문발동, 파주출판도시)’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단지(이하 파주출판도시)는 1989년 9월 5일 발기인 대회를 시작으로 출판계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실무 사업을 위해 1990년 11월 16일 협동조합을 설립했으며 1994년 단지 건설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이사장은 열화당 대표인 이기웅이 맡았다. 1998년 8월 30일 협동조합은 한국토지공사와 1차 시범 지구에 대한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입주자를 모집했으며 2007년 4월에 1단계 사업을 완성하였다.

안그라픽스는 파주출판도시 조성을 위한 발기인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후 협동조합에 출자하고 이사진으로 활동하였다. 1998년에 단지 내 부지를 신청했으며 2005년 토지를 구입하고 4월 1일 기공식을 가졌다. 사옥 설계는 (주)건축사사무소 조성룡 도시건축에서 맡았으며 2006년 5월 완공하였다. 이 건물은 3층짜리 본채와 1층짜리 별채로 나뉘어 있으며 본채는 사무실, 별채는 안상수의 개인 작업실로 계획되었다. 두 건물은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2005년 6월 11일 지식정보사업부가 출판사 푸른숲 건물 4층을 임대하여 사간동에서 파주출판도시로 자리를 옮겼고, 2006년 5월 사옥에 입주하여 그달 5-7일에 열린 〈파주 어린이 책 잔치〉에 참가하였다. 2008년 사업부를 출판 1팀과 2팀으로 나누면서 출판 1팀은 별채로, 2팀은 자료실이 있던 서울 명륜동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출판영업 팀은 입주 당시부터 지금까지 본채 1층 사무실을 쭉 사용하고 있다. 2011년 안상수가 상수동에서 파주로 작업실을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출판 1팀은 두 달 여 내부 수리를 거쳐 다시 본채 2층으로 이사했다. 안상수도 2012년 별채를 내부 수리한 뒤 2013년 여름에 이사를 마쳤다. 이 별채는 현재 ‘날개집’으로 불린다.

박달나라.네즈믄세온서른여덟해
넷째달.첫하루,.새봄.머리에
저.새바다.빛밝은땅.아름나라.서울.사는.
날개.이름.가진.작은.사내가
이곳.하늘.땅.산.물.검님께.
알뜰마음.모아.아뢰오니.받아주소서.
저희.안그라픽스에서.이곳에.
온뜻.모아.새.집을.지으면서
하늘.땅.산.물.검님께.비옵나니.
안그라픽스에서.일하는.사람들.
몸.튼튼함을.돌보아.주시옵고,.
그.분들의.집안.사람들.또한.
좋은.일을.많이.맞이하게.해주시옵고,.
이.일터도.튼튼하고.알차게.커나갈.수.있도록.돌보아.주시옵고,
이곳에.짓는.저희들의.하늘집이.
아물.일.없이.결대로.멋있게.지을.수.있도록.
도와주셔서,
안그라픽스가.이.나라에.우뚝.서고.
온누리.이름.떨치는.신나는.일터가.될.수.있게.
좋은.힘.몰아주시어.도와주시옵길.바라와,
삼가.맑은.술과.조촐한.차림을.올리오니.
부디.반가이.납시어.즐거이.드시옵소서.



안상수가 쓴 기공식 고사문, 20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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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해부터 안그라픽스가 정기적으로 참관해 온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 박람회이다. 1949년 9월에 처음 개최되었고 2014년 제66회를 맞았다. 안상수는 1985년 일반인 신분으로 37회를 처음 참관했으며 이듬해인 1986년 출판사 안그라픽스로서 38회 도서전에 참가하였다. 1998년 이전에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공식적인 한국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매해 국내 참가 업체를 위해 마련해 두는 공간이 국제서적관에 있었다. 안그라픽스는 출판물의 성격을 우선하여 국제서적관이 아닌 미술관에 따로 부스를 설치했다. 4년 뒤인 1990년 전시에 참가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첫 전시 이후 1987년부터 매해 전 대표이사인 김옥철이 도서전을 참관하였다. 사업부제를 시행한 뒤에는 사업부장 또는 편집 주간이 역할을 맡았다. 보통 한 두 명의 직원과 동행했으며 돌아온 뒤에는 세미나를 통해 회사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그 내용을 공유하였다.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대된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조직위원회는 ‘한국의 책 100’을 선정하였다. 여기에 한국전통문양집 3권인 《도깨비무늬》가 포함되었다. 《도깨비무늬》는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번역을 거친 뒤 한글과 영문을 함께 적은 책으로 독일에서 새롭게 디자인하여 출간되었다. 안그라픽스는 한국관에 부스를 설치하고 자체 출판물 뿐 아니라 다양한 디자인 제작물을 함께 전시하였다. 제1회 〈타이포잔치〉 도록(2002), 《왕세자 입학도》(2005),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도록 《Light into Life》(2005) 등이다. 2003년부터 출간한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한국어판도 소개하였다. 1986년 처음 참가했을 때처럼 부스 천장에 검정색 천을 달았다. 공간은 8제곱미터로 첫 전시 부스인 4제곱미터보다 두 배 넓었다. 김옥철, 이세영, 이희선, 문장현, 오성훈, 윤동희, 최윤미가 현지를 방문하였다.

부쓰를 얻다. 겨우 2미터×2미터 짜리 작은 공간이었다. 작지만 돈이 들었다. 처음엔 우리나라 출판사들이 있는 국제서적관에 얻을까도 망설였지만 결국 미술서적관으로 택하였다. 부쓰를 얻은 것은 그냥 구경꾼으로 참석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작년(85년) 전시회 땐 구경꾼으로 갔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부담이었고 겁이 났다. 책은 세 권 만을 가지고 갔다. ‘서울 시티 가이드(Seoul City Cuide)’, ‘한국문양집(Korean Motifs #1 Geometric Patterns)’, ‘배병우 사진집, 마라도’. 결과는 그저 그랬다. 처음이니까.

〈’86 프랑크푸르트 서적 박람회 참관기〉(안상수), 월간 《디자인》, 1987.2